
영화 [오펜하이머]는 “원자폭탄을 만든 남자”의 전기 영화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한 사람이 자신의 선택과 결과를 어떻게 감당하려 했는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과학자 오펜하이머가 천재적인 두뇌로 핵 개발을 이끌기까지의 과정뿐 아니라, 그 이후 죄책감과 정치적 공격 속에서 어떤 태도로 살아가게 되는지가 영화의 중심에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오펜하이머]를 과학과 권력, 책임과 죄책감, 그리고 ‘이후의 삶’이라는 세 가지 관점으로 정리해 봅니다.
1. 과학과 권력: 머릿속 이론이 현실 무기가 되는 순간
초반의 오펜하이머는 순수한 이론물리학자에 가깝습니다. 유럽 유학 시절, 양자역학과 최신 물리 이론에 매료되어 강의와 연구에만 몰두합니다. 그에게 세계는 실험실과 강의실, 논문 속 수식으로 구성된 공간에 가까웠습니다. 그러다 전쟁, 파시즘의 위협, 유대인 박해 같은 현실 정치가 그의 삶을 침범하면서, 연구는 곧 전쟁과 연결되기 시작합니다. 맨해튼 프로젝트는 이 지점에서 탄생합니다. 정부와 군은 오펜하이머의 두뇌와 인맥, 리더십을 원했고, 그는 “나치보다 먼저 도달해야 한다”는 위기의식 속에서 이를 받아들입니다. 영화는 이 선택을 단순히 애국심이나 야망으로만 설명하지 않습니다. 학자로서 새로운 물리학의 가능성을 끝까지 밀어붙이고 싶은 욕구, 자신이 중심에 서 있을 수 있다는 자의식, 전쟁을 끝내고 싶다는 생각이 복잡하게 섞여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과학과 권력은 완전히 엮입니다. 처음에는 이론과 실험의 문제처럼 보이던 연구가 곧 군인의 언어, 전략과 연결됩니다. 오펜하이머는 자신의 계산과 판단이 곧 수많은 사람의 생사 문제로 이어지는 자리에 서게 됩니다. 영화는 여기서 “과학은 중립적이고, 사용하는 건 정치의 문제”라는 단순한 구분이 얼마나 취약한지 보여 줍니다. 과학자가 결정 과정에서 완전히 빠져 있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모든 것을 통제할 수도 없는 모순적인 위치가 드러납니다.
2. 책임과 죄책감: 폭탄 이후에 시작되는 문제
실제 폭탄 실험이 성공하는 순간, 영화는 잠깐의 환호 뒤에 서서히 들어오는 불편함을 보여 줍니다. 트리니티 실험의 빛과 폭발은 과학적 성취의 정점처럼 묘사되지만, 바로 이어지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투하는 영화 속에서 직접적으로 재현되지 않습니다. 대신 오펜하이머의 얼굴, 환청, 왜곡된 청중의 모습 등 심리적 반응으로 표현됩니다. 오펜하이머는 자신이 한 일을 곧바로 부정하지도, 완전히 정당화하지도 못합니다. 그는 “우리가 전쟁을 끝냈다”는 평가와 “우리가 지옥의 문을 열었다”는 자각 사이에서 흔들립니다. 이후 그는 수소폭탄 개발 반대, 핵무기 통제와 관련된 발언을 이어가며 자신의 위치를 조정하려 하지만, 이미 폭탄은 사용되었고 세계는 핵 시대에 들어섰습니다. 영화가 흥미로운 지점은, 오펜하이머의 죄책감을 완전히 미화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는 분명 뛰어난 지성과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지만, 동시에 정치 감각이 둔하고, 사람 관계에서도 모순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죄책감과 책임 의식은 있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모든 것을 막을 수 있었다고 확신하지도 않습니다. 이 애매함이 영화 전체의 정조를 이룹니다. [오펜하이머]는 “한 천재가 후회했다”는 단순한 이야기보다, “한 사람이 어디까지 책임질 수 있고, 어디서부터는 책임질 수 없는가”라는 불편한 질문을 던집니다.
3. 정치, 심문, 그리고 이후의 삶
영화 후반부를 채우는 것은 회고록 같은 장면이 아니라, 청문회와 심문에 가까운 공간입니다. 오펜하이머는 냉전 초기에 공산주의 연루 의혹, 보안 위협 인물로 몰리며 공직에서 밀려나게 됩니다. 한때 국가가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자원을 몰아줬던 과학자가, 정세가 바뀌자 곧바로 위험 요소로 취급되는 장면은 과학과 정치의 관계를 적나라하게 보여 줍니다. 이 과정에서 오펜하이머의 과거 발언, 인간관계, 정치적 성향이 모두 재해석됩니다. 영화는 이 심문 장면들을 단순한 피해자 만들기 서사로만 사용하지 않습니다. 오펜하이머의 판단 실수, 모호한 태도, 자신도 피해 가고 싶었던 순간들을 함께 보여 주며, “완전히 억울한 사람”도, “완전히 잘못한 사람”도 아닌 인물로 그립니다. 관객은 그를 옹호하면서도 동시에 불편함을 느끼게 됩니다. 마지막에 아인슈타인과 나누는 대화, 그리고 호수 앞 장면은 영화의 방향을 요약해 줍니다. 핵무기가 만들 세계의 변화를 두 사람 모두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이를 되돌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인식이 공유됩니다. 오펜하이머는 결국 자신의 이름이 “세계를 바꾼 사람”이자 “돌이킬 수 없는 것을 만든 사람”으로 남게 될 거라는 것을 압니다.
4. 정리하면
정리하면 [오펜하이머]는 천재 과학자의 일대기를 따라가면서, 과학과 권력이 만나 생기는 책임의 문제를 집요하게 묻는 영화입니다. 한 사람이 한 선택이 어떤 세계를 만들었는지, 그리고 그 사람은 이후의 삶을 어떻게 견디며 살아가야 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명확한 답이나 면죄부를 주지 않는 대신, “나였다면 어디까지 책임질 수 있었을까”라는 질문을 관객에게 돌려주는 작품에 가깝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