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패왕별희를 처음 본 건 한참 전 일인데, 그 잔상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세 시간이 넘는 러닝타임 동안 단 한 번도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고, 영화가 끝난 뒤에는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이렇게 오래된 영화가 이렇게 깊이 박힐 수 있다는 게 신기했습니다. 천카이거 감독의 이 작품은 경극이라는 중국 전통 예술을 배경으로 하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많은 것을 담고 있습니다. 두 남자의 우정과 집착, 사랑과 배신, 그리고 격동하는 중국 현대사가 한 편의 영화 안에 빽빽하게 녹아 있습니다. 패왕별희는 무대 위에서 살고 무대 밖에서 무너진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영화 패왕별희의 이야기를 아래에서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경극이 만든 두 사람, 그리고 그 균열
영화는 1920년대 베이징의 경극 훈련소에서 시작됩니다. 혹독한 훈련 속에서 두 소년이 만납니다. 강인하고 현실적인 두치와, 섬세하고 여성적인 면모를 가진 샤오러우입니다. 두치는 훈련소에서 버림받다시피 맡겨진 아이였고, 샤오러우는 기생인 어머니 손에 자란 아이였습니다. 서로 다른 출신과 성격을 가진 두 사람은 경극을 통해 깊이 연결됩니다. 특히 두치는 패왕별희에서 우희 역을 맡으면서 샤오러우가 연기하는 패왕 항우와 운명처럼 짝을 이루게 됩니다. 문제는 두치가 무대 위의 역할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게 된다는 데 있습니다. 그는 우희라는 여인의 역할에 완전히 몰입하면서, 샤오러우를 단순한 파트너가 아니라 자신의 전부로 여기게 됩니다. 샤오러우가 지쥐안이라는 여성과 사랑에 빠지고 결혼을 선언했을 때, 두치의 세계는 균열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샤오러우에게 두치는 무대의 파트너이자 오랜 친구이지만, 두치에게 샤오러우는 그 이상입니다. 이 어긋남이 영화 전체를 흐르는 비극의 씨앗입니다. 영화는 이 감정을 직접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대신 두 사람의 눈빛과 몸짓, 무대 위와 무대 밖에서의 미묘한 차이를 통해 전달합니다. 경극의 화려한 분장과 의상 뒤에 숨겨진 각자의 감정이 조금씩 새어 나오는 방식이 매우 정교합니다. 두치가 무대 위에서 우희를 연기할 때와, 무대 밖에서 샤오러우를 바라볼 때의 눈빛이 다르지 않다는 것. 그 경계가 무너진 순간부터 두치의 비극은 시작됩니다.
격동하는 중국, 무대 위에서도 피할 수 없는 시대
패왕별희의 배경은 단순한 개인의 이야기를 담기에 너무 큰 역사를 품고 있습니다. 영화는 1920년대부터 1970년대 문화대혁명문화 대혁명 이후까지, 중국이 가장 격렬하게 변화한 시기를 배경으로 합니다. 일본 점령기, 국공 내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그리고 문화 대혁명. 이 거대한 역사의 물결은 두 사람의 삶을 계속해서 흔들어 놓습니다. 무대 위의 경극은 변하지 않지만, 그 무대를 둘러싼 세상은 끊임없이 바뀝니다. 특히 문화대혁명 장면은 영화에서 가장 충격적인 부분입니다. 홍위병들 앞에서 두치와 샤오러우는 서로를 비판하고 고발하는 자리에 세워집니다. 살아남기 위해 가장 가까운 사람을 배신해야 하는 상황. 샤오러우는 두치를 고발하고, 두치는 샤오러우의 아내 쥐쥐안을 고발합니다. 수십 년을 함께한 두 사람이 살기 위해 서로에게 칼을 겨누는 그 장면은, 보는 내내 가슴이 무거워집니다. 그것이 개인의 나약함인지, 시대가 강요한 비극인지 영화는 쉽게 판단하지 않습니다. 영화가 묻는 것은 바로 이 지점입니다. 인간은 극한의 상황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는가. 예술과 신념은 시대의 폭력 앞에서 얼마나 유지될 수 있는가. 두치는 끝까지 자신의 역할과 감정에 충실하려 하지만, 그 충실함이 오히려 그를 더 깊은 고통으로 밀어 넣습니다. 반면 샤오러우는 현실과 타협하면서 살아남지만, 그 과정에서 잃어버린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어느 쪽이 옳은지 영화는 끝까지 말하지 않습니다.
무대의 끝, 그리고 패왕별희라는 제목의 의미
패왕별희는 경극의 제목이기도 합니다. 초나라 패왕 항우가 사랑하는 우희와 마지막을 맞는 이야기. 우희는 항우의 짐이 되지 않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영화는 이 경극의 내용을 두 주인공의 삶과 겹쳐놓습니다. 두치가 평생 연기해온 우희의 운명이, 결국 두치 자신의 운명과 다르지 않게 됩니다. 무대 위의 이야기가 무대 밖의 현실이 되는 순간, 영화는 가장 고요하면서도 가장 강렬한 엔딩을 향해 나아갑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두 사람은 오랜 세월이 흐른 뒤 다시 무대에 서서 패왕별희를 연습합니다. 젊은 시절처럼 함께 노래하고 움직이는 그 순간은 아름답고, 동시에 슬픕니다. 그리고 두치는 그 자리에서 진짜 우희처럼 선택을 합니다. 이 결말은 충격적이지만, 영화 전체의 흐름을 돌아보면 필연처럼 느껴집니다. 두치에게 무대와 삶은 처음부터 하나였고, 그 경계를 끝까지 지운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패왕별희는 사랑 이야기이기도 하고, 우정 이야기이기도 하며, 역사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가장 깊은 층에서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끝까지 붙들고 살았던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시대가 바뀌고, 세상이 요구하는 것이 달라져도, 두치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역할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그를 파멸로 이끌었지만, 동시에 그를 가장 순수하게 만든 것이기도 합니다. 영화가 끝나고 오랫동안 그 이름이 마음속에 남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