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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균의 마지막 영화, 행복의 나라를 보고 나서 한참 일어나지 못했다

ssoo1023 2026. 3. 22. 22:30

 

이 영화를 보러 가기 전부터 마음이 복잡했습니다. 이선균 배우가 세상을 떠난 이후 처음 공개되는 유작이라는 사실을 알고 들어가는 것과, 모르고 들어가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경험이 될 것 같았습니다. 극장 불이 꺼지고 영화가 시작되면서 그 걱정이 맞았다는 걸 바로 알았습니다. 이야기에 집중하고 싶은데 화면 속 이선균의 얼굴이 계속 이야기 밖의 감정을 건드렸습니다. 역사 영화이고 법정 드라마이고 그것만으로도 묵직한 영화인데, 거기에 배우의 죽음이라는 감정이 덧씌워지니 보는 내내 감정이 복잡했습니다. 영화 행복의 나라의 이야기를 아래에서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10.26과 12.12 사이, 아무도 다루지 않았던 그 시간

행복의 나라는 1979년 10월 26일 대통령 암살 사건에 연루된 군인 박태주와, 그의 변호를 맡은 변호사 정인후의 이야기입니다. 박태주는 상관의 명령으로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직접 방아쇠를 당긴 것도 아니고, 거사를 기획한 것도 아닙니다. 그저 명령에 따랐을 뿐인데 사형 위기에 처합니다. 그리고 그 재판을 둘러싸고 전상두라는 인물이 권력을 장악해 가는 과정이 배경으로 깔립니다. 10.26을 다룬 영화는 전에도 있었고, 12.12를 다룬 서울의 봄도 있었는데, 그 사이 재판 과정을 정면으로 다룬 건 이 영화가 처음입니다. 그 시도 자체는 충분히 의미 있습니다. 서울의 봄을 본 사람이라면 전상두라는 인물이 누구를 모티브로 했는지 바로 알 수 있습니다. 서울의 봄이 그 인물을 불 같고 다혈질인 악인으로 그렸다면, 행복의 나라는 감정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 서늘한 인간으로 묘사합니다. 유재명의 연기가 이 역할에 딱 맞습니다. 소리를 지르지 않는데도 무서운 사람, 그게 어떤 의미에서는 더 오싹합니다. 이 부분은 영화에서 가장 잘된 부분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조정석이 연기하는 정인후 역시 평소의 유쾌한 이미지와 달리 진중하고 절박한 변호사를 잘 소화했습니다. 조정석이라는 배우가 이런 역할도 된다는 걸 새삼 확인한 영화였습니다. 이선균이 연기하는 박태주는 말이 많지 않은 인물입니다. 억울함을 크게 호소하거나 감정을 쏟아내기보다, 그냥 묵묵히 자신의 자리에서 버티는 사람입니다. 그 조용함이 오히려 더 깊게 박혔습니다. 보다가 몇 번 멈추고 싶었습니다. 이 사람이 지금은 없다는 사실이 계속 끼어들었기 때문입니다. 영화 속 캐릭터가 아니라 배우 자체가 생각나는 순간들이 있었고, 그 감정이 영화를 보는 내내 떠나지 않았습니다.

잘 만들었는데, 그래도 아쉬운 것들

솔직히 말하면 이 영화에 대해 마냥 좋은 말만 하기가 어렵습니다. 잘 만든 영화라는 건 분명합니다. 배우들 연기도 좋고, 시대 재현도 꼼꼼하며, 법정 장면의 긴장감도 살아있습니다. 그런데 후반부로 갈수록 이야기가 늘어지는 느낌이 있습니다. 중반까지는 긴장감이 팽팽하게 유지되다가, 결말을 향해 가면서 뭔가 힘이 빠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몇몇 관람객들도 같은 말을 했더라고요. 124분이라는 러닝타임이 체감상 조금 더 길게 느껴졌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리고 역사적 사실과 픽션을 섞는 방식에 대해서 한 번은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영화 서두에 모든 인물과 사건은 픽션임을 밝히고 시작하는데, 정작 영화 안에서는 실제 역사적 사건과 날짜, 장소를 그대로 씁니다. 10.26, 12.12, 실제 공관의 모습까지 나오면서 관객이 이것을 실제 이야기로 받아들이게 만드는 구도입니다. 전상두와 골프장에서 마주치는 장면 같은 경우는 극적인 분노와 답답함을 만들어내긴 하지만, 동시에 너무 작위적이라는 느낌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실제와 허구가 뒤섞이는 부분에서 불편함을 느끼는 관객이 꽤 있었고, 저도 그 지점에서 잠깐 몰입이 깨졌습니다. 변호인이나 서울의 봄과 비교되는 건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비슷한 시대, 비슷한 소재를 다루는 만큼 자연스러운 비교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세 영화가 각자 다른 층위를 건드리기 때문에 우열을 가리는 게 의미 없다고 생각하지만, 순수하게 영화적 완성도로만 보자면 행복의 나라는 그 두 영화보다 한 단계 아래에 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래도 이 영화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고, 그것은 충분히 가치 있습니다.

엔딩 크레딧 앞에서 일어나지 못한 이유

영화 마지막에 한대수의 노래 행복의 나라로 가 흘러나오면서 엔딩 크레딧이 올라갑니다. 그 순간 극장 안이 조용해졌습니다. 눈물을 닦는 사람들이 있었고, 자리에서 바로 일어나는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영화의 결말이 주는 먹먹함도 있었지만,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이선균 배우를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크레딧 마지막에 우리는 이선균과 함께했음을 기억합니다라는 문구가 나오는데, 그 문구 앞에서 감정이 한 번 더 무너졌습니다. 이 영화가 손익분기점인 300만을 넘기지 못하고 약 70만 관객에 그쳤다는 것이 아쉽습니다. 여름 성수기 경쟁작이 많았던 것도 있고, 이선균 배우의 사건으로 인해 개봉 자체가 복잡한 과정을 거친 것도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의 평점이 꽤 높다는 건, 보러 온 사람들은 충분히 만족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입소문이 더 널리 퍼졌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행복의 나라는 완벽한 영화가 아닙니다. 후반부가 늘어지고, 역사와 픽션의 경계가 모호한 부분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불완전함을 알면서도 한 번은 봐야 할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이선균의 마지막 모습을 보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그 시대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기 위해서도요. 영화가 끝나고 나서 모두가 간절히 원했던 행복의 나라는 결국 어디에 있었는가라는 질문이 오래 남았습니다. 그 질문 하나만으로도, 이 영화는 충분히 볼 이유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