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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업 못한 백수가 재난에서 제일 쓸모있는 사람이 된 영화, 엑시트

ssoo1023 2026. 3. 23. 01:30

엑시트를 보러 갔을 때 사실 기대를 거의 안 하고 들어갔습니다. 개봉 전에 주변 반응이 미지근했거든요. 재난 코미디라는 장르 자체가 어중간하게 느껴졌고, 조정석이랑 윤아 조합도 살짝 의아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보고 나서 꽤 당황했습니다. 예상보다 훨씬 재밌었거든요. 특히 취업 못한 백수 용남이 클라이밍 실력 하나로 재난 상황에서 가장 쓸모 있는 사람이 된다는 설정이, 단순한 코미디 소재가 아니라 지금 이 시대 청년들한테 뭔가 건드리는 게 있었습니다. 극장에서 웃다가 잠깐 멈칫한 순간이 있었는데, 용남이 가족들한테 취업 언제 하냐는 소리 들으면서 가스 테러를 피해 건물 옥상을 뛰어다니는 장면이었습니다. 웃긴데 웃기지 않은 그 묘한 기분. 영화 엑시트의 이야기를 아래에서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어머니 칠순 잔치에 가스 테러라니, 이 황당한 설정이 왜 통했나

이용남은 한때 대학 클라이밍 동아리 에이스였습니다. 근데 그게 10년 전 이야기이고, 지금은 백수입니다. 취업 문턱에서 계속 미끄러지고, 집에서는 누나들한테 구박받고, 어린 조카한테도 무시당하는 신세입니다. 어머니 칠순 잔치가 열리는 연회장에서 대학 시절 짝사랑이었던 동아리 후배 의주를 우연히 만나는데, 의주는 그 연회장에서 부점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둘 다 대학 시절 꿈이랑 지금 현실이 많이 다른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도심에 유독가스가 퍼지기 시작하고, 두 사람은 살아남기 위해 건물 옥상과 건물 사이를 넘나들며 탈출을 시도합니다. 이 영화가 재밌는 이유는 설정이 황당한 게 아니라 황당한 설정이 현실이랑 묘하게 맞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취업에 아무 도움이 안 된다고 핀잔 듣던 클라이밍 취미가 재난 상황에서 유일한 생존 수단이 되는 것. 가족들이 한심하게 봤던 백수가 막상 위기가 터지자 누구보다 빠르게 움직이는 것. 현실에서 쓸모없다고 여겨지던 것들이 극한 상황에서 가장 빛나는 무기가 된다는 이야기는, 지금 이 시대 많은 취준생들이 자기도 모르게 이입하게 만드는 코드입니다. 그게 이 영화가 단순한 코미디 이상으로 공감을 얻은 이유 같습니다. 조정석과 임윤아의 조합은 처음에 이 둘이 왜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실제로 보면 잘 맞습니다. 조정석은 원래 코미디 연기가 자연스러운 배우이고, 윤아는 아이돌 출신이라 액션 장면을 소화할 수 있는 체력과 유연성이 있습니다. 두 사람이 서로 의지하면서 건물 사이를 넘나드는 장면들이 CG 없이 대부분 실제 와이어 액션으로 찍었다는 걸 나중에 알았는데, 그래서 그 장면들이 더 현실감 있게 느껴졌던 것 같습니다. 감독이 7년 동안 이 시나리오를 준비하면서 자신의 백수 경험을 용남 캐릭터에 녹였다는 이야기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웃기면서 찜찜한 부분들, 솔직하게

영화가 끝나고 나서 찜찜한 게 하나 있었습니다. 가스 테러의 원인과 테러범에 대한 이야기가 영화에서 거의 다뤄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테러범은 초반에 잠깐 등장해서 트럭으로 가스를 살포하고 스스로 죽는데, 왜 그랬는지 전혀 설명이 없습니다. 재난 코미디라는 장르 특성상 원인보다 탈출 과정에 집중하는 건 이해하는데, 그래도 수백 명이 죽었을 수 있는 테러 사건의 배경이 아예 없다는 건 좀 무책임하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씨네 21 전문가 평점이 관객 평점보다 낮은 이유 중 하나가 이 부분이기도 합니다. 탈출 과정의 반복적인 패턴도 중반 이후로 살짝 눈에 띄기 시작합니다. 위기 상황 → 아이디어 → 탈출 → 다시 위기 상황의 구조가 계속 반복됩니다. 이 구조 자체가 나쁜 건 아닌데, 후반부로 갈수록 새로운 자극이 부족해지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가스가 퍼지는 상황에서 특정 탈출 방법이 현실적으로 가능한가 하는 의문이 드는 장면들도 몇 군데 있습니다. 물론 이건 영화니까라고 넘어갈 수 있는 부분이긴 한데, 현실성에 민감한 분들이라면 중간에 몰입이 깨질 수 있습니다. 드론 생중계로 용남의 탈출 과정을 실시간으로 보는 가족들과 시민들의 반응이 웃음 포인트로 활용되는데, 이 장면들이 재밌긴 한데 동시에 조금 어색하기도 합니다. 사람이 죽어나가는 재난 상황인데 구경꾼처럼 응원하는 장면들이, 감독이 의도적으로 만든 코미디라는 걸 알면서도 분위기 전환이 너무 가볍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었습니다. 이 부분은 재난 영화와 코미디 영화 사이에서 영화가 아직 균형을 완전히 잡지 못한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942만이 극장에서 함께 웃은 이유

엑시트는 개봉 전 예상을 완전히 뒤엎고 942만 관객을 동원했습니다. 같은 날 개봉한 경쟁작들이 기대에 못 미치는 성적을 거둔 것도 반사이익이 있었겠지만, 그것만으로 이 숫자를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개봉 전에 뻔한 양산형 코미디 영화라고 여겨지던 영화가 평단과 흥행을 동시에 잡은 건, 역시 이야기가 지금 이 시대 사람들의 감정에 정확하게 닿았기 때문일 겁니다.

취업 준비는 곧 재난 상황이라는 말이 영화 안에 나오는데, 이 한 마디가 이 영화의 정서를 가장 잘 요약합니다. 재난 영화의 가스가 현실에서 청년 세대가 느끼는 막막함과 무기력함이라는 해석이 과장처럼 들릴 수 있지만, 막상 영화를 보면 그 해석이 억지스럽지 않습니다. 용남이 가족들한테 구박받다가 재난 상황에서 제일 먼저 움직이고, 아무도 믿어주지 않던 능력이 가장 중요한 무기가 되는 그 과정이, 요즘 취준생들한테 위로가 됐을 것 같습니다. 내가 지금 쓸모없어 보이는 것들이 언젠가 빛날 수 있다는 메시지, 거창하지 않게 웃음 속에 녹여냈다는 점이 이 영화의 가장 큰 미덕입니다. 무겁지 않게 보고 싶은 날, 킬링타임 용도로는 손에 꼽히는 영화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