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살인이 어쩔 수 없었다고요? 박찬욱 신작 어쩔수가없다를 보고 나서

ssoo1023 2026. 3. 22. 21:58

 

솔직히 말하면 이 영화를 보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웃겨야 할 것 같은데 웃음이 잘 안 나왔고, 그렇다고 슬프지도 않았습니다. 뭔가 찜찜하고 불편한 감정이 계속 남는 그 느낌. 사실 박찬욱 감독 영화를 볼 때마다 이런 기분이 드는데, 이번에도 어김없었습니다. 보고 나서 친구한테 어땠냐고 물었더니 "재밌긴 한데 뭔가 기분 나쁘다"라고 하더라고요. 그 말이 딱 맞는 것 같습니다. 기분 나쁜 영화인데 왜 봤냐고 묻는다면, 박찬욱이라는 이름 세 글자가 주는 기대감이 있으니까요. 그리고 그 기대가 완전히 틀리지는 않았습니다. 영화 어쩔 수가 없다의 이야기를 아래에서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25년 다닌 회사에서 잘린 남자, 그 뒤에 벌어지는 일

주인공 만수는 25년간 제지 회사에 다녔습니다. 종이 만드는 일, 요즘 식으로 말하면 전형적인 사양 산업입니다. 그 회사에서 하루아침에 해고 통보를 받습니다. 영화 초반에 만수가 해고 소식을 듣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병헌의 표정이 인상적입니다. 분노하거나 울지 않습니다. 그냥 멍합니다. 그 멍한 표정이 오히려 더 무겁게 느껴졌습니다. 아마 실제로 해고를 당해본 사람이라면 저 표정이 얼마나 사실적인지 바로 알 것 같습니다. 그 이후 만수의 생활이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차를 팔고, 아내 미리는 테니스 레슨을 끊고 치위생사 일을 시작합니다. 만수는 마트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제지 회사 면접을 계속 보러 다닙니다. 그런데 문제는 25년 동안 제지 회사만 다녔으니 아는 게 그것뿐이라는 겁니다. 다른 직종으로 넘어가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고, 제지 업계 자체가 줄어들고 있으니 자리가 없습니다. 이 부분을 보면서 솔직히 남의 이야기 같지 않았습니다. 한 가지 일만 오래 하다 보면 그 일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어지는 상황, 지금 이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겪고 있는 현실이니까요. 그러다 만수가 내리는 결론이 영화의 핵심입니다. 자리가 없으면 만들면 된다는 것.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경쟁자들을 직접 없애버리면 된다는 것. 여기서부터 이 영화가 블랙 코미디 스릴러로 본격적으로 전환됩니다. 취업 경쟁자들을 하나씩 제거해 나가는 과정이 펼쳐지는데, 그게 황당하면서도 어느 순간 이상하게 고개가 끄덕여지는 순간이 생깁니다. 그 순간이 바로 이 영화가 노리는 지점이고, 그 지점이 가장 불편한 지점이기도 합니다.

웃겨야 하는데 왜 안 웃겼나, 솔직한 감상

영화 홍보 때 박찬욱 감독 영화 중 가장 웃기다고 했는데, 저는 그 말에 절반 정도만 동의합니다. 물론 웃긴 장면들이 있습니다. 만수가 경쟁자를 조사하고 미행하는 과정이 얼핏 보면 코미디처럼 보이기도 하고, 상황 자체의 황당함이 웃음을 유발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 웃음이 오래 가지 않습니다. 웃다가 바로 뒤에 이게 웃을 일인가 싶은 감정이 따라오거든요. 살인 장면들이 썩 재밌지 않았다는 게 제 솔직한 감상입니다. 박찬욱 감독 특유의 정교한 미장센은 이번 영화에서도 분명히 느껴집니다. 카메라 구도 하나하나가 계산된 느낌이고, 집과 정원을 활용하는 방식도 인상적입니다. 그런데 경쟁자를 제거하는 과정이 반복되면서 중반부에 약간 지루함이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이야기가 한 방향으로만 달리는 느낌이랄까요. 기생충 같은 영화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계속 튀어나가는 것과 비교하면, 이 영화는 처음 설정한 방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손예진이 연기하는 아내 미리 캐릭터는 좋았습니다. 남편이 무슨 짓을 하는지 알면서도 가족을 지키기 위해 덮어주는 그 캐릭터가, 어떻게 보면 영화에서 가장 무서운 인물입니다. 만수보다 미리가 더 냉철하게 현실을 파악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장면들이 있었는데, 그 부분이 오히려 더 흥미로웠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미리를 더 깊게 파고들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박찬욱이 묻는 것, 그리고 내가 불편했던 이유

박찬욱 감독 영화를 보고 나면 항상 이런 기분이 듭니다. 뭔가를 이해한 것 같은데 이해하지 못한 것도 있고, 찜찜한데 왜 찜찜한지 정확히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번 영화도 그랬습니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 만수의 선택이 정말 어쩔 수 없는 것이었는지를 계속 생각하게 됩니다. 영화 제목 자체가 그 질문입니다. 어쩔 수가 없다. 근데 정말 어쩔 수가 없었을까요. 만수는 스스로 어쩔 수 없다고 반복해서 되뇝니다. 그런데 영화를 들여다보면 그 선택들이 사실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닌 경우도 있습니다. 아내가 일을 시작했고, 집이 날아갈 위기는 아직 오지 않았으며, 마트 알바라도 하면서 버틸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만수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이유는 사실 생존보다 자존심에 가깝습니다. 25년간 쌓아온 커리어와 중산층의 삶을 잃는 것, 그 자존심의 붕괴를 견디지 못하는 겁니다. 영화는 그 점을 직접 말하지 않지만, 보다 보면 느껴집니다. 그리고 그것이 이 영화의 가장 예리한 지점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이 얼마나 쉽게 도구처럼 소모되고 버려지는지, 그리고 그 시스템 안에서 살아남으려는 사람이 어디까지 타락할 수 있는지를 이 영화는 블랙 코미디의 언어로 건드립니다. 불편한 건 맞습니다. 근데 그 불편함이 영화가 잘못된 게 아니라 현실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박찬욱 감독 영화가 늘 그랬듯, 이해하기 어려운 장면들도 있고 다 소화하지 못한 느낌도 있습니다. 그래도 보고 나서 한동안 생각이 남는 영화, 그게 이 감독 영화의 특징이고 이번 작품도 그 범주 안에 있습니다. 다만 기대치보다 재미는 좀 덜했다는 것, 솔직하게 말씀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