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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행 - 좀비보다 더 무서운 건 같은 칸 안의 사람들이었다

ssoo1023 2026. 3. 1. 00:40

부산행을 처음 봤을 때 좀비 영화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 사람인데도 중간에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좀비가 무서운 게 아니라 열차 안의 사람들이 무서웠습니다. 연상호 감독은 좀비라는 장르적 도구를 빌려서 사실은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재난 앞에서 인간이 어떻게 되는지, 살아남기 위해 타인을 어디까지 밀어낼 수 있는지, 그리고 반대로 어떤 사람은 왜 자신을 내어주는지. 부산행은 좀비 영화의 외형을 하고 있지만 속은 한국 사회의 민낯을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2016년 개봉 당시 천만 관객을 넘기며 한국 좀비 영화의 새로운 기준을 세운 이 작품이 왜 지금도 회자되는지, 영화 부산행의 이야기를 아래에서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달리는 열차 위의 인간 군상

영화는 펀드 매니저 석우가 딸 수안을 데리고 부산행 KTX에 오르면서 시작됩니다. 석우는 바쁜 일상 속에서 딸에게 소홀했던 아버지입니다. 이혼 후 딸의 생일도 챙기지 못하고, 딸이 원하는 건 함께하는 시간인데 돈으로 대신하려는 사람. 영화는 이 아버지와 딸의 어색한 관계를 재난이 시작되기 전에 먼저 보여줍니다. 이 설정이 중요한 이유는 재난이 시작된 뒤 석우가 어떻게 변해가는지를 보여주기 위한 기준점이 되기 때문입니다. 열차 안에는 다양한 인물들이 탑승해 있습니다. 임신한 아내를 데리고 부산으로 향하는 우직하고 강인한 남자 상화, 야구부 학생들과 함께 탄 소녀 영국, 노인 자매, 그리고 혼자 살아남으려는 기업 상무 용석. 이 인물들이 좀비 사태가 터지면서 각자의 본성을 드러냅니다. 위기 앞에서 서로를 돕는 사람이 있는 반면, 자신의 생존을 위해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는 사람도 있습니다. 영화는 이 대비를 통해 재난이 인간을 새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원래 있던 것을 드러낸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마동석이 연기하는 상화는 이 영화에서 가장 강렬한 존재감을 남기는 캐릭터입니다. 말이 많지 않고, 설명하지 않으며, 그냥 몸으로 행동하는 사람. 아내를 지키기 위해 좀비 무리 속으로 뛰어드는 그 장면은 영화에서 가장 뜨거운 순간 중 하나입니다. 상화가 있기 때문에 영화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 캐릭터 하나가 열차 안의 분위기를, 그리고 스크린 앞 관객의 감정을 붙들어 줍니다.

좀비가 아니라 사람이 만드는 공포

부산행에서 진짜 공포는 좀비에게서 오지 않습니다. 좀비는 본능에만 따르는 존재입니다. 선택이 없고, 판단이 없으며, 그저 움직입니다. 무섭지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반면 용석이 하는 행동들은 이해하기가 더 어렵습니다. 그는 살아남기 위해 다른 생존자들을 좀비 쪽으로 밀어 넣고, 문을 잠그고, 자신에게 불리한 정보를 숨깁니다. 그 행동들이 좀비의 공격보다 더 섬뜩한 이유는 그것이 의지를 가진 사람의 선택이기 때문입니다. 영화가 비추는 것은 재난이 아니라 그 재난 안에서 작동하는 사회의 논리입니다. 나만 살면 된다는 논리, 나와 내 사람만 중요하다는 논리. 용석이라는 캐릭터는 극단적으로 그려지지만, 그 논리 자체는 현실에서도 낯설지 않습니다. 세금은 내기 싫고, 복지는 나보다 더 필요한 사람에게 주기 싫고, 위험한 시설은 내 동네가 아닌 곳에 지으면 된다는 생각. 부산행이 좀비 영화이면서 동시에 사회 비판 영화로 읽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연상호 감독은 이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말하는 대신, 달리는 열차 안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대신합니다. 반대편에는 상화가 있고, 석우가 있고, 영국이 있습니다. 자신보다 약한 사람을 먼저 챙기고, 위험을 알면서도 뒤를 돌아보는 사람들. 이들의 선택이 영화에 온기를 만들어줍니다. 재난 속에서도 사람다운 것을 잃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그것이 부산행이 절망적인 이야기이면서도 끝까지 볼 수 있게 만드는 이유입니다. 좀비 영화인데 울게 만드는 것은 그 선택들이 관객의 마음을 건드리기 때문입니다.

천만이 함께 탄 열차, 부산행이 도착한 곳

부산행은 2016년 개봉해 천만 관객을 돌파했습니다. 한국 좀비 영화 최초의 천만 기록이었고, 이후 넷플릭스를 통해 전 세계에 소개되면서 한국 장르 영화의 가능성을 세계에 알린 작품이 됐습니다. 부산행 이후 한국의 좀비 콘텐츠에 대한 세계적인 관심이 높아졌고, 킹덤 같은 후속 작품들이 나오는 데 이 영화가 닦아놓은 길이 있었습니다. 하나의 영화가 장르의 흐름을 바꾼 경우입니다. 이 영화가 천만을 넘긴 것은 좀비라는 장르가 한국에서 처음 시도됐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관객들이 이 영화에서 좀비 너머의 무언가를 봤기 때문입니다. 2016년은 한국 사회가 여러 가지로 어수선했던 시기입니다. 세월호 이후의 기억, 서로를 믿지 못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달리는 열차 안의 이야기는 단순한 픽션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을 것입니다. 재난 앞에서 우리는 서로를 어떻게 대하는가. 그 질문이 영화 밖에서도 유효했기 때문에 더 많은 사람이 반응했습니다. 석우가 마지막에 딸 수안을 위해 내리는 선택은 영화의 가장 감동적인 순간입니다. 처음에는 자기 자신과 딸만을 생각하던 사람이, 열차 안에서 겪은 일들을 통해 달라지는 과정. 그 변화가 억지스럽지 않고 설득력 있게 느껴지는 것은 영화가 그 과정을 차근차근 보여줬기 때문입니다. 좀비보다 사람이 무섭고, 그 사람이 결국 사람다움을 되찾는 이야기. 부산행이 달리는 열차 안에서 하려 했던 이야기는 결국 그것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