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운대 - 쓰나미보다 더 무서웠던 건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해운대를 처음 봤을 때 쓰나미 장면보다 그전에 나오는 사람들 이야기가 더 마음에 남았습니다. 재난 영화니까 당연히 거대한 파도가 하이라이트겠거니 생각했는데, 막상 보고 나니 그 파도가 오기 전에 쌓아놓은 사람들의 감정이 훨씬 오래 남았습니다. 윤제균 감독은 한국 영화 최초의 본격 재난 블록버스터를 만들면서, 스펙터클 뒤에 사람의 이야기를 단단하게 심어뒀습니다. 해운대 백사장, 여름 성수기, 수백만 명이 모인 그곳에 쓰나미가 온다는 설정은 그 자체로 충분히 공포스럽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가 단순한 재난 영화로 기억되지 않는 이유는, 파도가 오기 전 그 사람들 각각의 삶이 너무 생생하기 때문입니다. 영화 해운대의 이야기를 아래에서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파도가 오기 전, 사람들의 이야기
영화는 쓰나미가 닥치기 전 해운대에 살고 있는 여러 인물들의 일상을 촘촘하게 쌓아 올립니다. 해녀 출신 여성 연희와 그녀를 짝사랑하는 만식, 연희의 딸 지민, 그리고 서울에서 내려온 지질학자 김휘와 그의 전 연인 히미. 여기에 연희의 아버지와 만식의 친구들까지 여러 인물들이 각자의 사연을 안고 해운대라는 공간에 모여 있습니다. 이 인물들의 이야기는 따로따로 진행되다가 재난이 시작되면서 하나로 뒤섞입니다. 만식이 연희에게 마음을 전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장면, 지민이 처음으로 좋아하는 남자 앞에서 설레는 장면, 김휘가 헤어진 연인과 어색하게 재회하는 장면. 이 평범하고 소소한 일상의 조각들이 재난이 시작되면 전혀 다른 무게를 갖게 됩니다. 아무 일도 없을 것 같은 여름 휴가지의 풍경과, 그 아래서 이미 바다 밑에서 움직이고 있는 지각판의 대비. 영화는 이 간극을 인물들의 일상을 통해 만들어냅니다. 관객은 이 사람들의 사정을 알게 된 뒤에야 비로소 재난이 진짜 두려워집니다. 설경구가 연기하는 만식은 이 영화에서 가장 오래 기억에 남는 인물입니다. 웃기고 엉뚱하고,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남자.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그 사람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가 영화의 감정적 정점을 만들어냅니다. 재난 영화에서 캐릭터가 이렇게 깊이 박히는 경우는 흔하지 않습니다. 만식이라는 인물 하나가 이 영화를 기억하게 만드는 힘의 상당 부분을 담당합니다.
쓰나미, 한국 영화가 만든 재난의 스케일
해운대가 개봉한 2009년 당시, 한국 영화가 이 정도 스케일의 재난 장면을 만들어냈다는 것은 그 자체로 화제였습니다. 거대한 파도가 해운대 백사장을 덮치는 장면, 건물들이 무너지고 물이 도시를 삼키는 장면들은 CG 기술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충분한 충격을 줬습니다. 당시 관객들은 스크린 앞에서 자신이 알고 있는 해운대가 저렇게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더 강하게 반응했습니다. 유명한 관광지이자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가본 공간이 재난의 무대가 된다는 설정이 영화의 공포를 배가시켰습니다. 재난 장면에서 영화는 스펙터클을 보여주면서도 인물들을 놓치지 않습니다. 파도 속에서 각 인물들이 어떤 상황에 처하는지, 누가 누구를 찾고 있는지가 빠른 편집 안에서도 선명하게 전달됩니다. 재난 영화의 가장 큰 약점은 사람이 그냥 배경처럼 쓸려 나가는 느낌인데, 해운대는 앞에서 충분히 쌓아놓은 인물들의 사연 덕분에 그 약점을 피해 갑니다. 화면 속에서 쓸려가는 사람이 아는 사람처럼 느껴지는 것, 그것이 이 영화의 재난 장면이 단순한 볼거리로 끝나지 않는 이유입니다. 김인권이 연기하는 만식의 친구 형식 캐릭터는 영화에서 유머를 담당합니다. 재난이 다가오는 긴장된 상황에서도 웃음을 놓지 않는 이 캐릭터 덕분에 영화는 한 가지 톤으로만 흐르지 않습니다. 재난 영화에서 유머가 잘못 쓰이면 분위기를 해치지만, 해운대에서는 이 캐릭터가 오히려 인물들 사이의 관계를 더 따뜻하게 만들고, 재난이 닥쳤을 때의 감정적 낙차를 더 크게 만드는 역할을 합니다.
1145만이 해운대로 모인 이유, 재난 뒤에 남은 감정
해운대는 2009년 여름 개봉해 1145만 관객을 동원했습니다. 한국 재난 영화의 가능성을 처음으로 증명한 작품으로 평가받습니다. 이 흥행의 이유를 단순히 쓰나미 장면의 스펙터클로만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관객들이 이 영화를 보러 간 이유 중에는 해운대라는 공간에 대한 친근함도 있었고, 한국 영화가 이런 장르를 어떻게 소화하는지에 대한 궁금함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막상 보고 나서 남는 것은 파도보다 사람의 이야기였습니다. 재난 영화가 관객에게 주는 감정은 복잡합니다. 화면 속의 공포를 안전한 자리에서 경험하는 스릴이 있고, 동시에 내가 저 상황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하는 자기 투영도 있습니다. 해운대는 여기에 더해 저 사람들이 살아남았으면 좋겠다는 감정을 만들어냅니다. 그 감정은 영화 전반부에서 인물들의 이야기를 충분히 쌓아놓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만식이 연희에게 마음을 전하는 데 성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관객이, 쓰나미 장면에서 만식이 어디 있는지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해운대는 완벽한 영화가 아닙니다. CG의 한계도 있고, 인물이 많아서 각자의 이야기가 충분히 깊어지지 못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 영화가 재난이라는 장르를 진지하게 시도했고, 그 안에 사람의 온기를 담으려 했다는 것만으로 이 영화는 의미가 있습니다. 파도가 모든 것을 쓸고 간 자리에서도 남는 것은 결국 사람이라는 것. 해운대가 끝나고 나서 오래 기억에 남는 장면들이 모두 거대한 파도가 아니라 사람의 얼굴인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