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휴민트를 보러 가기 전에 기대가 꽤 있었습니다. 류승완 감독이고, 조인성에 박정민에 신세경까지. 모가디슈랑 베를린 좋아했던 입장에서 이 조합이라면 믿고 봐도 되겠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보고 나서 극장을 나오는 발걸음이 살짝 무거웠습니다. 나쁜 영화는 아닙니다. 배우들 연기도 좋고, 블라디보스토크의 회색빛 공기를 담아낸 영상도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런데 보는 내내 어딘가 본 것 같다는 느낌이 떠나질 않았습니다. 류승완 감독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일수록 오히려 더 그렇게 느낄 수 있는 영화입니다. 영화 휴민트의 이야기를 아래에서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벌어지는 남북 첩보전,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국정원 블랙 요원 조 과장은 동남아시아에서 진행하던 휴민트 작전에서 정보원을 잃습니다. 그 상실감을 안고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한 그는 북한 식당 종업원 채선화와 접촉합니다. 새로운 정보원으로 그녀를 선택하는 것인데, 이전 작전에서 사람을 잃었다는 트라우마가 있는 조 과장에게 이 선택은 단순한 임무 이상의 무게를 가집니다. 한편 보위성 조장 박건은 북한 총영사 황치성이 인신매매와 국제 범죄에 연루됐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 조사 과정에서 자신의 약혼자 채선화가 위험에 빠져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남한 국정원 요원과 북한 보위성 조장이 같은 사람을 지키기 위해 손을 잡는 구도입니다. 설정 자체는 흥미롭습니다. 휴민트라는 단어 자체가 낯설어서 처음 들었을 때 뭔 뜻인지 찾아봤는데, 사람을 통해 정보를 얻는 인적 네트워크라는 의미입니다. 사람을 도구로 쓰는 첩보 세계에서 그 사람을 진심으로 대하는 요원의 이야기,라는 설정이 꽤 좋습니다. 그런데 영화가 이 설정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한다는 게 아쉽습니다. 휴민트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데 정작 휴민트와 관련된 이야기는 초반에 잠깐 나오고, 이후로는 그냥 액션 첩보물로 달립니다. 제목과 내용 사이의 간극이 보는 내내 걸렸습니다. 박정민이 연기하는 박건은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입니다. 조인성이야 워낙 믿고 보는 배우인데, 이번에는 박정민이 오히려 더 강하게 남았습니다. 냉혹한 보위성 요원인데 약혼자 앞에서 균열이 생기는 그 감정의 변화를 박정민이 아주 정교하게 표현합니다. 그의 액션도 조인성과는 결이 다른데, 조인성이 긴 팔다리를 활용한 타격감 있는 싸움이라면 박정민은 좀 더 예측불허하고 날카로운 느낌입니다. 이 영화를 보고 박정민이라는 배우를 다시 봤다는 관객들이 많은데,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베를린을 봤다면 낯설지 않을 구조, 그게 문제입니다
솔직한 얘기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류승완 감독의 베를린을 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휴민트를 보는 내내 어디선가 본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습니다. 제3국에서 남북한 첩보요원이 얽히고, 북한 내부의 부패한 권력자가 악당으로 등장하고, 남북 요원이 공동의 적 앞에서 손을 잡고, 그 과정에서 북한 쪽 인물이 희생되는 구조. 베를린의 뼈대와 거의 같습니다.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는 영화라고 하는데, 같은 세계관이라는 게 같은 이야기 구조를 반복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베를린이 2013년 작품이니 12년 만에 나온 후속 격인데, 그 12년 동안 이야기가 얼마나 진화했는지가 잘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여성 캐릭터 처리에 대한 지적도 나왔는데, 틀린 말이 아닙니다. 채선화는 두 남자가 지키려는 대상으로만 기능합니다. 신세경이라는 배우가 충분히 좋은데, 이 역할이 그 배우를 제대로 쓰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 생겼습니다. 여성 인신매매 묘사에 대해 류승완 감독 본인도 지적을 인정하고 더 신경 쓰겠다고 했을 정도니, 이 부분은 영화 스스로도 온전히 해결하지 못했다는 것을 아는 것 같습니다. 좋아하는 감독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 아쉬운 지점입니다. 액션 자체는 나쁘지 않습니다. 초반 좁은 방에서의 격투, 다트를 활용한 박건의 등장 씬, 카 체이싱까지 류승완 감독 특유의 타격감 있는 액션이 여전히 살아있습니다. 다만 후반부 총격전이 너무 길고 루즈하다는 반응이 많은데, 어두운 극장에서 총기 발사로 인한 번쩍임이 계속되다 보니 피로감이 쌓이는 것도 사실입니다. 2년마다 신작을 내는 빠른 제작 주기가 이 부분에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연출에만 집중할 시간이 더 필요한 것 아닐까 하는 생각 말입니다.
류승완을 좋아하기 때문에 더 솔직하게 쓰는 말
이 영화의 관객 평점과 전문가 평점이 꽤 차이 납니다. 관객들은 나름 즐겁게 봤다는 반응이 많고, 평론가들은 새로움이 없다는 지적을 많이 합니다. 저는 그 중간쯤에 있는 것 같습니다. 보는 동안 지루하지는 않았습니다. 배우들 연기도 충분히 좋고, 블라디보스토크라는 공간의 분위기도 잘 살렸습니다. 그런데 극장을 나서면서 남는 게 뭔가 싶을 때, 딱 집어서 말하기가 어려운 영화입니다. 모가디슈를 보고 나서는 한동안 그 영화가 생각났는데, 휴민트는 그런 여운이 상대적으로 적었습니다. 류승완 감독을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베테랑2 이후로 슬럼프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휴민트도 그 흐름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좋아하는 감독이기 때문에 더 솔직하게 쓰는 겁니다. 새로운 걸 보여달라는 것, 이미 본 것 위에서 맴돌지 말라는 것. 류승완 감독이 아직도 뭔가를 만들어낼 여력이 있는 감독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결론적으로 조인성과 박정민의 케미, 두 배우의 연기만으로도 시간이 아깝지 않을 영화입니다. 액션 영화로서의 기본기는 충분히 갖춰져 있습니다. 다만 류승완 감독 영화에 기대하는 그 이상의 무언가를 원한다면, 아쉬움이 남을 수 있습니다. 기대치를 조금 낮추고 조인성과 박정민의 얼굴을 보러 간다는 마음으로 가시면 충분히 볼만한 영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