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솔직히 말하면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단종이라는 인물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었습니다. 수양대군한테 왕위를 빼앗기고 유배 가서 죽은 어린 왕, 그 정도였습니다. 역사 수업 시간에 배우긴 했는데 그냥 교과서 속 이름이었지 실제로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나서 집에 오는 길에 단종에 대해 더 찾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좋은 역사 영화가 하는 일이 바로 그거라고 생각합니다. 역사책 속 이름을 살아있는 사람으로 느끼게 만드는 것. 왕과 사는 남자는 그 역할을 꽤 잘 해냈습니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의 이야기를 아래에서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양반을 기다렸는데 왕이 왔다, 엄흥도와 단종의 만남
영화의 설정이 재밌습니다. 강원도 영월 광천골 촌장 엄흥도는 먹고 살기 힘든 마을 사람들을 위해 청령포에 유배객을 유치하려 합니다. 힘 있는 양반이 유배 오면 그 수행원들이 먹고 자고 쓰는 돈이 마을 경제를 살린다는 계산입니다. 그런데 촌장이 부푼 꿈으로 맞이한 사람이 왕위에서 쫓겨난 열여섯 살 어린 왕이었다는 것. 이 황당한 상황에서 영화가 시작됩니다. 유해진이 연기하는 엄흥도가 기대에 부풀었다가 현실을 마주하는 그 표정이 웃기면서도 묘하게 짠합니다.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가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는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박지훈이 연기하는 단종은 처음에 볼 때 아이돌 출신 배우라는 편견이 있었습니다. 근데 막상 보면 그 생각이 금방 사라집니다. 말이 없고, 눈빛으로만 감정을 전달하는 연기인데 그 눈빛의 층위가 생각보다 훨씬 깊습니다. 모든 걸 잃고 삶의 의지까지 잃어버린 열여섯 살 아이의 눈빛이 스크린을 꽉 채우는 순간들이 있는데, 그 순간에는 왜 이 영화가 천만을 넘겼는지 이해가 됩니다. 반면 유해진은 언제나 그렇듯 믿고 보는 배우입니다. 웃기다가 갑자기 묵직해지는 그 전환을 이 배우만큼 자연스럽게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두 배우의 케미가 이 영화의 가장 큰 자산입니다. 제목에 대해 한 가지 짚고 싶었습니다. 왕을 모시는 남자도 아니고, 왕을 지키는 남자도 아니라 왕과 사는 남자입니다. 이 차이가 영화 전체의 방향을 말해줍니다. 신분 차이가 엄격했던 시대에 촌장이 폐위된 왕과 같은 눈높이로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들이 영화 안에 계속 나오는데, 그 장면들이 그냥 지나치지 않고 마음에 남습니다. 권력을 다 잃고 나서야 비로소 한 사람으로 살게 된 왕의 이야기이기도 하니까요.
웃기다가 울리는 영화, 그리고 그 공식에 대한 솔직한 생각
이 영화를 보면서 장항준 감독이 명절 흥행 공식을 정확하게 알고 있다는 걸 느꼈습니다. 웃음 포인트 적절히 넣고, 마지막에 눈물 콧물 빼놓는 감동 코드까지. 오랫동안 한국 흥행 영화들이 써온 방식 그대로입니다. 실제로 극장에서 앞줄에 앉은 어르신들도 웃었고, 중학생쯤 돼 보이는 애들도 웃었고, 마지막에는 다들 조용해졌습니다. 세대를 아우르는 영화라는 말이 딱 맞습니다. 그리고 그것 자체는 분명 이 영화의 장점입니다. 다만 영화 좀 봤다 싶은 분들은 이 공식이 조금 뻔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저도 중반부에 슬슬 결말이 어떻게 흘러갈지 예상이 되기 시작했고, 그 예상이 크게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전문가 평점과 관객 평점이 꽤 차이 나는 영화인데, 씨네 21 평점은 6점대인 반면 관객 평점은 8점대 중반입니다. 이 간극이 이 영화를 정확하게 설명합니다. 대중적으로는 분명히 통하는 영화인데, 영화적 완성도 측면에서는 아쉬운 부분이 있다는 것. 특히 초반에 마을 사람들 캐릭터를 공들여 소개해놓고 후반부에는 그 사람들이 거의 사라져 버리는 점이 개인적으로 가장 아쉬웠습니다. 초반에 달리기 잘하는 사람, 요리 잘하는 사람 소개해줄 때는 나중에 뭔가 이 사람들이 활약하겠구나 기대를 했는데, 그냥 흐지부지됩니다. 표절 의혹 문제도 영화를 보기 전에 알게 됐는데, 그것이 영화를 보는 내내 한구석에 걸렸습니다. 제작사는 전혀 접한 적 없다고 밝혔고, 역사 소재 작품의 특성상 유사한 설정이 나올 수 있다는 입장입니다. 결론이 나지 않은 문제이니 여기서 판단하기는 어렵지만, 그 논란이 영화를 온전히 즐기는 데 살짝 방해가 된 것은 사실입니다.
1400만이 울었던 장면, 그리고 이 영화가 남긴 것
결말에 대해 말하기가 조심스럽습니다. 역사적 사실이니 단종이 어떻게 됐는지는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을 테고, 모르는 사람은 그냥 보시는 게 낫습니다. 다만 그 마지막 장면들이 꽤 오래 기억에 남는다는 것은 말할 수 있습니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 극장 불이 켜졌는데 주변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꽤 들렸습니다. 저도 눈물을 참느라 꽤 애를 썼습니다. 결말을 알고 들어갔는데도 그랬으니, 모르고 들어간 사람들은 더 많이 울었을 것 같습니다. 이 영화가 1400만을 넘긴 것은 단순히 유해진과 박지훈이 잘해서만은 아닐 것입니다. 역사가 기록하지 않은 사람들, 이름도 남기지 못한 채 옳은 선택을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스크린에 불러낸 것이 많은 사람의 마음에 닿았을 겁니다. 엄흥도라는 인물이 역사책에는 단 몇 줄로만 기록되어 있다는 것, 그럼에도 그런 선택을 했다는 것. 그 빈칸을 장항준 감독이 따뜻한 상상력으로 채웠고, 관객은 그 상상 속에서 자신이 알아봤으면 하는 무언가를 발견한 것 같습니다.
완벽한 영화는 아닙니다. 뻔한 구석도 있고, 후반 전개가 아쉬운 부분도 있습니다. 하지만 보고 나서 단종에 대해 더 알고 싶어지고, 엄흥도라는 인물이 실제로 어떤 사람이었는지 찾아보게 만드는 영화입니다. 그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자기 역할을 충분히 한 것 같습니다.